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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 육성자금이 우량기업을 삼켰다?

중소기업 육성자금이 우량기업을 삼켰다?
·정책자금 받은 사모펀드가 한국정수공업 경영권 장악해 논란


지난 6월 17일 서울시내의 한 호텔에서 기습적으로 한국정수공업 이사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한 사모펀드는 현 대표이사인 한국정수공업 이규철 회장의 해임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사모펀드가 회사의 경영권을 접수했다.

우량 중소기업으로 평가되는 한국정수공업의 경영권을 놓고 이 회사에 투자한 사모펀드(PEF)와 기존 오너인 이규철 회장 측이 일전을 벌이고 있다. 사모펀드는 부실경영을 이유로 이 회장에 대한 대표이사 해임안건을 통과시켰으며, 이규철 회장 측은 원천 무효라며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따라 한국정수공업에 대한 경영권 향방은 법원의 판단에 맡겨지게 됐다.


경기도 안산에 있는 한국정수공업 전경. / 권순철 기자이사회 열어 현 대표이사 해임안 통과


한국정수공업은 국내 최대 발전용 수(水)처리 제조업체다. 세계 시장에서도 이 회사는 최상위에 랭크될 정도로 기술력을 인정받는 기업이다. 지난 1959년 설립된 이 회사는 산업용수 처리기술 개발에만 매진해 성공한 대표적인 중소기업이다. 현재 원자력, 화력, 열병합 발전소 등에 수처리 설비를 독점적으로 공급하고 있다. 최근 원전부품 관련 각종 비리로 사회적 문제가 됐지만 원전 등에 공급한 이 회사의 제품이 문제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엔지니어 출신인 이규철 회장은 30년 이상 대표이사를 맡았다.


경영권 분쟁에 휘말리게 된 원인은 2010년 하반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국정수공업을 이끌어온 이규철 회장이 뇌경색으로 쓰러지는 등 회사에 위기가 찾아왔다. 이규철 회장 이외에 이 회사를 창업했던 대주주들이 동요했으며, 대주주들은 갖고 있던 주식의 매각을 시도했다. 당시 이 회장은 회사 지분 35.8%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다른 대주주 3인은 나머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이명박 정부는 지역 우수 중소·중견기업에 자금을 지원하는 중소기업 신성장동력펀드 70여개를 만들었다. 신성장동력펀드 중 하나인 이 사모펀드가 이 회장 이외의 한국정수공업 지분을 인수해 경영이 정상화했다. 신성장동력펀드 사업은 공기업인 한국정책금융공사가 담당하고 있다. 재원은 정책금융공사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했다. 일종의 공적 자금인 셈이다.


한국정수공업의 지분을 인수한 사모펀드의 경우 정책금융공사는 사모펀드 투자전문업체인 JKL파트너스와 정책금융공사 관계사인 KDB캐피탈(산은캐피탈)에 이 사모펀드(KDC-JKL PEF)를 공동운용하도록 했다. 이 사모펀드는 2010년 8월 정책자금 642억원을 들여 한국정수공업 지분 68.1%를 인수했다. 당시 한국정수공업 최대주주가 된 사모펀드가 이사회를 장악하는 대신 경영권과 인사권은 이 회장에게 주는 내용의 '주주간 계약'을 체결했다. 당시 체결한 '주주간 계약'에 따르면 '회사의 경영권 및 인사권은 대표이사(이규철 회장)가 전적으로 행사한다'고 돼 있다.


지난 2년 동안 사모펀드는 주식을 우리사주 등에 매각해 현재는 지분 49.9%(474억원 규모)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 회장 측과 사모펀드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대립해 왔다. 사모펀드는 "회사 감사 결과 이 회장이 딸을 사장으로 앉히고 부적절하게 회사 자금을 사용하는 등 방만한 경영을 했다는 점이 밝혀졌다"며 이 회장에게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사모펀드 측이 내세우는 인사와 공동대표 체제로 하자고 해서 관철시켰다. JKL파트너스 관계자는 "당시 '주주간 계약'을 맺을 때는 이규철 회장이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행위를 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 회장은 그렇지 않았다"며 "한국정수공업의 대표이사로서 이 회장의 불법을 용인할 수 없고, 이 회장 해임은 상법상 선관주의 의무(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를 지킨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후 사모펀드는 이 회장을 해임하고 사모펀드 측 공동대표를 회사 단독대표로 등록시켰다.


이에 대해 한국정수공업 측은 사모펀드가 각종 구실을 붙여 회사를 빼앗으려 했다고 반발하고 있다. 한국정수공업 측은 대표 직무집행 정지 가처분 신청과 이에 따른 손해배상 소송을 서울중앙지법에 제출했다. 한국정수공업 고문변호사인 김용명 변호사는 "친족 고용문제는 이 회장의 인사권 문제이고 회사측에서 잘못 사용한 자금은 조사해서 밝혀지면 변상조치하기로 했었다"며 "사모펀드가 '주주간 계약'을 위반하면서까지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양측의 분쟁으로 한국정수공업은 신용이 하락하는 등 회사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명박 정부 당시 기술력은 우수하나 담보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을 돕겠다고 만든 신성장동력펀드로 인해 한 중소기업이 위기에 몰리고 있는 것이다.


"방만한 경영 탓" vs "펀드가 회사 빼앗아"

국회에서는 정책자금을 투입해 만든 신성장동력펀드가 취지에 맞게 사용되고 있는지 면밀히 살펴보고 있다. 몇 가지 문제점이 드러났다. 정책금융공사가 국회 정무위원회 김기식 의원실 등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신성장동력펀드 주무기관인 정책금융공사는 한국정수공업 사태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다. 정책금융공사가 자금운용을 맡긴 이후에는 사모펀드의 주주권 행사, 주식 매각 등 일체의 행위에 관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모펀드가 정책자금으로 중소기업의 경영권을 인수해도 관여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정책금융공사 관계자는 "위탁자는 위탁운용사의 펀드 자산 운영과 관련해서 어떤 식으로든지 관여할 수 없도록 돼 있다"며 "다만 투자 회사의 부도, 법정관리 또는 워크아웃 신청 등 중대한 문제가 있을 때만 보고하도록 돼 있다"고 말했다,


정책금융공사는 KDB캐피탈에서 한국정수공업에 파견한 최 모 실장이 부적절한 처신(금품수수 등)으로 면직됐지만 이에 대한 보고조차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책금융공사 관계자는 "KDB캐피탈 측으로부터 펀드 운용 인력이 바뀐다는 통보를 받았을 뿐 자세한 얘기는 보고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KDB캐피탈 측은 "직원 신상과 관련한 문의에는 말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중소기업 육성자금인 신성장동력펀드가 기업에 자금을 직접 지원하지 않고, 구주를 인수하는 데 지원한 것이 옳으냐는 논란도 있다. 사모펀드는 한국정수기업 기존 주주로부터 주식(구주)을 인수하는 데만 642억원을 썼다. 즉 사모펀드는 구주를 인수해서 경영권을 확보하는 하는 데만 자금을 사용했지 한국정수공업에 직접 자금을 지원하지는 않았다. 한국정수공업 관계자는 "사모펀드는 회사에 자금을 한 푼도 지원해주지 않고 그동안 우리사주를 비싸게 파는 등 돈놀이를 한 것이나 다름없다"며 "당시 한국정수공업이 대기업에 넘어갈까 두려워 중소기업 육성자금으로 생각하고 지분을 넘겼는데 결국 이렇게 됐다"고 말했다.


이 사모펀드는 펀드 결성액 1600억원 중 642억원을 한국정수공업 인수에 사용했다. 펀드 자산의 40%를 특정 기업에 사용한 것이다. 국회 정무위원회 한 관계자는 "정책자금으로 운용되는 펀드가 펀드 자산의 3분의 1 이상을 한국정수공업에 투자한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며 "이 펀드가 처음부터 경영진 교체 등의 의도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정책금융공사 관계자는 "이 사모펀드의 경우 일종의 경영권 참여 투자로 지분 10% 이상을 인수해서 경영에 참여한다"며 "그래야 기업의 회계상 투명성을 확보하고 기업 가치를 제고시키는 등 기업의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